실연, 낙방, 사고 등의 기억들. 누구나 하나씩은 이런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성숙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황폐화 시켜버리기도 한다. 약으로 이런 기억들을 지울 수 있다면 어떨까. 프로프라놀롤(propranolol)은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하지만 그로 인한 고통과 번민에는 효과가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 약은 처음에 고혈압 약으로 개발이 되었다. 발명가인 James W. Black은 그 공로로 1988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정신과에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질병이 있는데 교통사고, 전쟁, 강간 등 끔찍한 경험을 한 환자들이 사고로 난 육체적인 상처가 다 가라앉은 후에도 사고에 대한 악몽을 꾸고 그 장면을 잊지 못하고 그로 인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는 불안장애의 일종이다. 이스라엘의 의사 Shalev는 사고로 응급실에 온 사람들 중 심장이 빨리 뛰는 사람들에서 나중에 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실에 착안해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는 효과가 있는 프로프라놀롤을 사고 24시간 이내에 복용하게 하니 나중에 복용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적게 발생하는 것이 확인됐다. 프로프라놀롤의 이러한 효과는 동물실험에서 프로프라놀롤이 불안을 관장하는 뇌구조물인 편도체(amygdala) 내에 시냅스(뇌신경 간의 연결 조직) 형성을 억제해 생기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 자체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사고와 관련되어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불안을 유발하는 시냅스가 안 생긴다는 얘기다.
어쩌면 사랑 고백을 하러 가는 사람들은 간첩들이 만일에 대비해 독약을 품고 다니듯 호주머니에 프로프라놀롤을 담아가 혹시나 고통스런 거절을 당하면 복용해볼 수도 있겠다. 단 24시간 이내에.
프로프라놀롤은 또 하나의 다른 용도에도 사용되기도 한다. 면접을 앞둔 입사 지망생이나 공연을 앞둔 연주자 등에서 면접이나 공연 20-30분전에 복용하면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도 떨지 않고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 불안’에 대한 프로프라놀롤의 효과는 심박수를 줄여 가슴두근거림을 없애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작용 때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혹시나 면접이나 연주를 엉망으로 하고도 그 기억을 잊어버리게 하는 약의 효과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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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9 21:41